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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간추린 바이올린 제작 역사

1500년대 중반 - 안드레아 아마티

크레모나에 있던 안드레아 아마티에 의해 지금의 바이올린 형태가 정립했다 한다. 그러나 크레모나 학파만의 공은 아니고 가스파로 다 살로로 대표되는 브레시아 학파 또한 바이올린 정립에 큰 공헌을 했다.
프랑스 황실로 시집한 카테리나 메디치는 뒤떨어진 프랑스 왕실문화를 높이기 위해 이탈리아 문화를 가져는데, 클래식을 연주를 위해 아마티를 구입한다. (아들인 킹샤를9의 이름이 붙음) 

1600년대 - 아마티 왕조

아마티 제작가문은 유럽에 널리 알려졌고, 안드레아의 손자인 니콜라 아마티 밑에서 과르네리, 스타이너, 루게리, 카파, 쎄라핀 그리고 스트라디바리 같은 후에 황금시대를 이끌 제자들이 이후 자신들의 제작가문을 세운다.

1700년대 - 스트라디, 델제수 (크레모나의 전성시대)

아마티의 제자였던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독립하자 아마티 스타일에서 탈피해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모두 새로운 기준을 세우며, 지금까지도 카피되고 있다.

스트라디 바이올린/비올라/첼로

과르네리 가문에서도 바르톨로메오 주세페 "델 제수"가 등장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요절을 하여 바이올린 밖에 남기질 못했다. 그는 브레시아 학파와의 교류를 통해 스트라디의 고운 소리와 다른 힘차고 어두운 음색을 만들어냈다.
델 제수의 바이올린은 스트라디와 함께 가장 흔히 카피되고 있다.
 
18세기 중반 스트라디와 과르네리 가문의 제작이 끊기면서 크레모나는 동력을 잃었고, 그들의 제자가 자리 잡은 밀라노(체루티), 토리노(G.B.과다니니)에서 부흥을 노렸으나, 1796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침공이 있으면서 거의 100년의 침체기를 겪는다.

1700년대  - 독일 제작가문의 시작

흔히 올드 독일 악기가 올드 프랑스 악기보다 낮은 취급을 받기에 프랑스 보다 늦게 악기제조를 시작했다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았다.

16세기에 이미  Graslitz에 바이올린 제작가문이 자리 잡았고, 17세기엔 아마티의 제자인 야콥 스타이너(Jacob Stainer)가 독일로 돌아가 유럽에서 크게 성공을 거뒀다. 바하(18세기 초반), 모짜르트(18세기 중후반)도 그의 바이올린을 사용했다. 심지어 19세기초반 이탈리아 바이올린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한다. 그의 바이올린은 울림이 큰 대신 직진성이 약한 배불뚝이 특징이 있어, 낭만시대 이후로는 찬밥취급을 받아 덩달아 독일 바이올린의 위상이 약해진 경향이 있다.

 

독일은 두군데 도시에 자리잡은 유명 제작가문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 클링겐탈(Klingenthal) - 보헤미아 지역(포크틀란트Vogtland와 체코 인근). Hopf 가문이 유명.
  • 미텐발트(Mittenwald) - 이탈리아에 가까움. Klotz 가문(스타이너랑 연결된다한다)이 유명.

보헤미아 지역의 중심은 인근인 마르크노이키르헨으로 넘어 갔으며, 미텐발트는 지금도 독일 바이올린 제작의 중심이며 미텐발트 제작대회가 열린다.

1800년대  - 프랑스 공방

19세기 프랑스 파리는 쇼팽 등이 활동하던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 얘기는 악기 수요가 크니 악기 기술의 발달이 자연스레 뒤따랐다. 이런 연관관계는 악기사의 큰 흐림이다.
19세기 들어 루포와 JB 뷔욤이라는 거장이 등장했고, 뷔욤은 스트라디 카피를 통해 고급악기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축적된 기술은 고급공방(뷔욤공방, 강드&베르나델, 카레사 프랑소와)을 통해 궁전과 살롱에 고급악기를 공급할 수 있게했다.

그래서 살롱에서 큰 울림을 위해 몸통크기를 키운 악기가 흔히 보이기도 한다.

스트라디가 현대 바이올린의 모습을 정했다면, 이때 프랑소와 뚜르뜨는 현대활의 모습을 정립했다. 여기에 공방시스템을 통해 많은 제작자들이 양성됐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래서 지금도 프랑스활은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현대활의 등장은 강하고 빠른 연주를 가능하게 해서 악기의 구조에도 영향을 주었다. 프로젝션을 위해 넥은 길어졌고 강한 음을 견디기 위해 베이스바는 두꺼워졌다. 지금 연주에 사용되는 올드악기들은 후대에 수리를 한 것들이다.

19세기 후반 부르조아 계급이 주류가 되며 그들이 음악을 배우기 위한 바이올린 수요가 생겼다. 미르쿠르(mirecourt)에 콜린메장 같은 공방에서 중가 악기를, JTL, 라베르테 같은 대형공방에서 저가 악기를 공급하였다. 

또한 바장, 모리조 같은 공방에서는 바이올린 활을 이들에게 공급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악기들은 영국, 미국으로도 수출되었다.

1800년대  - 영국 딜러

19세기 이전 영국은 독일에서 귀화한 헨델이 있었지만 문화 면에서 별볼일 없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부르조와가 크게 늘며 악기에 대한 수요가 커졌다. 힐앤선(W.E. Hill & Sons)로 대표되는 영국딜러들은 유럽제작 악기들을 유통했고 또한 자체 공방을 운영하며 품질 좋은 활과 첼로를 공급했다. 프랑스에서 마코텔, 샤노 등이 영국으로 건너가 일하며 제작기술을 전수했다. 이런 악기를 Anglo-French라 한다.

어두운 면으로는 스트라디 같은 악기를 고가악기를 구할 수 있게 되면서, 볼러형제 같은 사람들에게 복사품을 만들게 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 칼레찌가 가짜 제작으로 유명했다.

영국악기의 한가지 특이한 점으로는 첼로의 강세를 들 수 있다. 18세기말부터 작은 교회에서 오르간을 대신하기 위해 첼로의 수요가 생겼고, 포스터, 뱅크 등의 제작가문의 첼로가 유명하다.

1800년대 중반~1900년대 초반 - 모던 이탈리안

크레모나 황금시대 전에도 독일 Fussen 지방에 있던 독일 제작자들이 이탈리아로 넘어와 베니스, 플로렌스, 로마, 나폴리 등에 뿌리를 내렸고 학파를 형생하였다. 크레모나에서 꽃을 피운 이탈리아 바이올린은 직간접적으로 주변 학파에 영향을 주웠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와 독일 등의 산업화로 인력이 빠져나가며 침체기를 겪었다가, 19세기 중반이 되면 그 인력들이 돌아오며 이탈리아 악기의 부흥을 이끌었다 한다.
다음은 각 학파가 있던 도시들이다.

지역 특징 모던 제작자
밀라노 크레모나학파의 마지막 제자 체루티에게서 배운 안토니아찌 부터 시작해서 비쟉 스쿨로 이어진다. 스가라보토, 오르나티, 가림베르티, 비쟉, 스데르치
볼로냐 라파엘 피오리니로 부터 시작.
밀라노 학파가 스트라디라면 볼로냐는 과르네리 성향.
폴리스트리, 포찌, 비냐미, 귀찌아르디, 스크롤라베짜, 레가찌
베니스 크레모나 몰락 직후에 가장 유명(고프릴러, 몬타냐냐). 독일에 가까와 스타이너의 영향을 받음. 데가니, 사코니?
토리노 과다니니에서 시작했으며 19세기 중반 프레센다를 거침.
지리적 영향으로 프랑스 악기에 영향을 받음.
로카, 파뇰라
나폴리 18세기부터 시작된 갈리아노 가문으로 대표. 니콜로 갈리아노
만토바 피에트로 과르네리, 카밀로 드 카밀리로 연결. 가장 외부 영향을 덜 받았다 함. 스카람펠라, 가에타노 가다

이탈리아 바이올린이 부흥하면서 뿌리였던 크레모나를 다시 부흥시키고자 1938년에 크레모나에 바이올린 제작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가 황금기의 크레모나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고 오히려 볼로냐 학파가 가지고 있던 프랑스 제작방식에 영향을 받았지만, 1950년대 강사진이 밀라노 학파인 스가라보토, 오르나티, 가림베르티 였던걸 생각하면 결국 크레모나의 적통을 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부활한 이탈리아 악기는 20세기 중반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잠깐 침체기를 겪었으나 이 학교를 중심으로 다시 바이올린 제작의 본고장으로 우뚝 서있다.

1900년대 초중반- 독일/동유럽 공장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연습용 바이올린의 수요가 급증하였고 보헤미아 지방에서 독일악기 사업도 대형화 되었다. 중심에 있던 도시가

  • 마르크노이키르헨(Markneukirchen) - Heberlein, Roth 등의 악기가문. Kopf, 프리치시너 등의 활 제작가문
  • 오스트리아 쉔바흐(Schönbach; 지금의 체코 루비) - 마르크노이키르헨의 배후 도시로 반가공된 악기를 공급했다한다.

둘다 탄광도시였다 탄광산업이 시그러들며 나무와 인력을 구하기 쉅다는 이유로 바이올린 생산기지로 바뀌었다. 1880년부터 1914년사이에 마르크노이키르헨에서 약 7백만개의 현악기가 수출되었다 한다. 

2차 대전 후에 마르크노이키르헨가 공산권에 넘어가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독의 부벤로이트(Bubenreuth)가 새로운 생산도시로 떠올랐다.

그외에도 루마니아 레긴(Reghin), 불가리아 Kazanlak에서도 19세기 부터 바이올린이 생산이 되었고, 동유럽의 자유화 직후에는 서구권에 값싼 악기를 수출을 하며 산업을 키웠다.

이들 공장들은 20세기 전세계에 교육용 바이올린을 제공하다가, 20세기 후반 중국 바이올린에게 밀려나며 고급화를 통해 살아남으려 노력 중이다.

1900년대 초중반- 미국 딜러와 악기의 성공

 20세기 미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Wurlitzer(뉴욕), Moening(필라델피아), 케네스 워렌(시카고) 등이 기존 영국의 딜러와 경쟁하게 된다. 유럽에서 건너온 모렐, EA 우샤등이 샵에서 악기 제작, 복원을 담당했다.

또한 칼 베커, 윌리엄 살코 등이 악기/활 제작의 대부로서 명성을 얻었다. 
케네스 워렌이 세웠던 시카고 제작학교는 설립멤버인 이주호씨가 인수하며 지금도 운영중이다.

VSA(Violin Society of America)에서 운영하는 악기, 활 제작대회는 전세계 제작자들이 참여하는 메이저 대회이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피폐해진 이탈리아에서 부국인 미국과 아르헨티나로 이민붐이 일었다. 자연스럽게 바이올린 제작기술도 전파되었다. 미국 이민자 중에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사코니, 세르지오 페레슨이 있다. 특히 사코니는 미국에서 활약하며 많은 제작자/복원가들에게 영향을 줬고, 이후 크레모나 제작학교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자에서는 Luigi Rovatti가 유명하다. 미국이 바이올린 강국으로 유명해진데 비해 아르헨티나는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겪으며 제작자가 이탈리아로 돌아가거나 미국으로 건너 갔다.

1900년대 후반- 중국 공장악기

20세기 후반 중국의 산업화로 자체 악기 수요가 커졌다. 1980년대에 제작자들이 해외에서 악기를 배워와 1990년대에는 중국에 공장을 차렸으며, Zheng Quan이나 밍장주들은 해외 제작대회에서 훌륭한 성적을 내었다.

베이징, 광저우에 있는 공장에서 수출을 하면 지역 제작사들은 자체 브랜드를 붙여 판매한다(한국/독일 브랜드의 연습용 악기는 중국생산이다). 이제는 자체 브랜드(스캇 카오, 스노우)로도 판매를 하고 있다.

숙련된 기술자가 기계로 깍아 대량생산한 중국 공장악기가 1900년대 초중반 비숙련자가 독일 대형공방에서 수제로 만든 악기에 비해 훨씬 질이 좋다고 한다.

2000년대 - 평준화

21세기 세계화에 따라 동유럽, 중국, 한국의 제작자들이 크레모나, 시카고, 뉴왁(런던) 스쿨에서 배우고 졸업후 거기서 자리잡거나 아니면 돌아와 공방을 여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크레모나, VSA, 미텔발트 등의 바이올린 제작대회는 초기에는 그나라 제작자들만이 상을 탄데 비해 이제는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상을 타는 것이 흔해졌다#. 이제는 나라별 악기는 이렇다라는 것이 아닌 제작자의 특징이 중요해졌다.

참고